‘제7공화국 운동’을 시작하자

제21대 국회의 첫 정기국회에서 정의당은 다시 한 번 정부-여당과 그 반대 진영 사이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양대 정당이 첨예하게 맞붙은 공수처법 개정안을 놓고 크게 흔들렸다. “과감하게, 단단하게”를 외치며 혁신을 주창한 새 대표 체제가 들어섰는데도 그랬다.

이는 정의당의 체질에 여전히 큰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지금의 정치 체제와 정당 구도에서 소수 진보정당의 운신은 늘 이렇게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고약한 운명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선투표제 없는 대통령제와 승자독식형 선거제에 따른 국회가 결합된 정치 제도 아래에서 양대 정당 중심 정치의 구심력이 작동하는 ‘제6공화국’ 체제는 촛불 항쟁 이후 오히려 더욱 공고해졌다. 다들 잘 알듯이,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여기에 파열구를 내려 했던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역사적 기획은 양대 정당의 비례위성정당 공작을 통해 철저히 유린됐고, 제21대 국회의 정당별 의석 분포는 양대 정당 중심 정치의 절정을 보여준다. 지금 정의당은 이런 ‘제6공화국’ 체제의 뒤늦은 폭주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6공화국 극복 운동’을 통해 정치 개혁과 사회 개혁을 하나로!

제6공화국 질서는 단지 진보정치의 발전만 제약하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이 낡은 질서에 발목이 묶여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제21대 국회가 이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 양대 정당은 아주 효율적인 담합과 공조를 통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처럼 그간 미루고 미뤄온 개혁 과제도, 기후 위기 대응처럼 새롭게 대두한 급박한 의제도 다 정치의 중심에서 밀어놓는다. 대신 추-윤 갈등 같은 엘리트 분파들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날을 지새운다.

이런 정치 체제 덕분에,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사회경제적 현실은 어떤 변화의 출구도 찾지 못한 채 그저 계속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기만 한다. 양대 정당을 통해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가시화할 수 있는 기득권층이나 상위 중산층이 공론장을 독점하다시피하고, 정작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만년 비정규직 노동자, 플랫폼산업 노동자, 고졸 혹은 전문대-지방대졸 청년, 노동 혹은 빈곤 여성, 다양한 소수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인구 분포의 2/3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지만, 공론장에는 오직 ‘산업화 세대 중산층’과 ‘민주화 세대 중산층’이 존재할 따름이다.

지금껏 진보정당의 언어 속에서 정치 체제의 문제와 사회경제 체제의 문제는 마치 별개인 양 나뉘어 있었다. 후자는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혹은 ‘20 대 80 사회’라는 틀을 통해 다뤄졌고, 전자는 선거제도를 중심으로 한 정치 개혁 담론의 대상이 됐다. 진보정당 스스로 정치 개혁과 사회 개혁을 별개의 과제처럼 제시했고, 대중도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다 보니 정치 개혁은 진보정당의 생존을 위한 안간힘으로 치부됐고, 정치 개혁과 사회 개혁을 서로 이으려는 시도는 기껏해야 단계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즉, 정치 개혁을 통해 진보정당이 성장하면, 그 힘으로 사회 개혁을 성사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양대 정당 중심의 정치 체제와 불평등한 사회경제 체제는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양대 정당 중심 정치가 불평등한 사회경제 질서에 대한 불만과 항의를 억누르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 노릇을 하고 있다. 특히 촛불항쟁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다. ‘제6공화국’의 정치 체제를 통해 ‘제6공화국’ 30여 년 동안 쌓여온 사회경제적 모순이 봉합되거나 억압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운동은 그간 자신의 정치 개혁 담론을 근본부터 다시 바라봐야 한다. 어차피 선거제도 개혁에만 집중했던 정치 개혁 전략은 비례위성정당 파문을 거치며 의미와 효력을 잃고 말았다. 이제 진보정당의 정치 개혁 전략은 더 넓은 맥락에서 ‘제6공화국’ 정치 체제 전반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제6공화국’이란 단지 1987년 정치 체제일 뿐만 아니라 그것과 얽혀 있는 현재의 한국 자본주의 질서를 가리키기도 한다. 즉, 진보정당운동은 ‘제6공화국 극복’ 담론을 통해 정치 개혁과 사회 개혁을 하나로 다시 통합하면서, 정치 개혁을 단순한 선거제도 개혁을 넘어선 더 크고 거대한 과제로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

정의당이 ‘완전 비례대표제 + 내각제’ 개헌을 제기하자

“정치 개혁을 선거제도 개혁을 넘어선 더 크고 거대한 과제로 제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승자독식 선거제도만이 아니라 이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대통령제까지 개혁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간 진보정당은 비례대표제 확대만 이야기하고, 기존 선거제도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대통령제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문재인 정부를 통해 ‘제6공화국’의 대통령제는 더 이상 한국 사회 개혁의 방향으로 작동하지 못함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국 진보정당운동이 추진해야 할 대안은 완전 비례대표제를 전제로 한 의회제, 즉 의원내각제다. 물론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는 그 자체로는 어느 쪽이 더 민주적인지 평가하기 힘들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점이다.

첫째는 완전 비례대표제의 실현이다. 양대 정당 중심 정치를 타파하는 제도적 통로인 완전 비례대표제는 대통령 정부가 아니라 의회 정부와 더 잘 어울린다. 완전 비례대표제와 어울리려면, 의원내각제이거나, 최소한 핀란드나 포르투갈 방식의 권력 구조(대통령을 직접 선출하지만, 권력 중심은 의회가 구성하는 내각에 있는 구조)여야 한다.

둘째는 ‘제6공화국’식 대통령제는 어쨌든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교과서 속 대통령제는 의원내각제와 견줘 더 낫거나 못하다고 할 수 없을지 몰라도, 대한민국의 현존 대통령제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 있다. 한국판 대통령제는 대의 민주제가 대중 참여 민주제로 발전해가야 할 시대에 오히려 이를 군주제(양대 정당 간 경쟁이 이뤄지는 선거가 따라붙을 뿐인)로 퇴행시키고 있다.

필자는 정의당이 완전 비례대표제를 전제로 한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창하자고 제안한다. 이미 촛불항쟁 직후에 제20대 국회에서 개헌 논의가 있었고 정의당도 개헌안을 내놓았지만, 대통령제에 손을 대자는 논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때가 됐다. 제21대 국회의 모순이 한 눈에 드러난 지금, 정의당은 양대 정당을 향해 볼멘소리를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 ‘제6공화국’ 정치 체제를 종식시키는 개헌을 제창해야 한다. 상징적으로는 “제6공화국을 끝장내고 제7공화국을 시작하자”고 선포해야 한다.

물론 그러자면 정의당 안에서부터 ‘완전 비례대표제 + 의원내각제’ 개헌을 당론으로 채택할지를 놓고 토론해야 한다. 토론의 결론은 열어둬야겠지만, 적어도 이 토론을 더 늦추거나 아니면 토론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토론이 벌어질수록 기층에서부터 당의 활력이 높아질뿐더러, 만약 이런 과정을 통해 대통령제를 종식시키자는 전면 개헌 당론을 채택한다면 이는 정의당의 더 없는 자산이 될 것이다. 정의당은 더는 자신의 독자적 존재 의의를 ‘강변’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이런 당론을 추진하는 정당을 양대 정당 어느 한 쪽의 ‘2중대’라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개헌 논의를 넘어 ‘제7공화국 운동’으로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첫 한 발자국일 뿐이다. ‘제6공화국을 끝내고 제7공화국을 시작하자’는 흐름은 대통령제를 끝내자는 개헌 논의를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이 흐름이 실제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힘으로 성장할 수 없다.

노동, 주거, 교육, 복지, 지역, 젠더, 평화, 생태 전환 등등 여러 측면에서, ‘제6공화국’으로 집약되는 현 사회경제 체제를 타파하고 새 질서를 열고자 하는 열망과 의지들이 모여야 한다. 개헌 과정에 이런 사회 변혁 요구들을 제기하고 관철하려는 대중운동들이 대두하고 이들이 결집해야 한다. 이 점에서, 2019년 말에 시작된 대중 항쟁의 힘으로 제헌의회를 통한 전면 개헌 과정을 연 칠레 사례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영감을 줄 수 있다.

정의당은 일단 개헌 논의의 포문을 연 뒤에 ‘제7공화국 운동’이라는 공동의 깃발 아래 다양한 사회운동과 민중집단을 결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정의당이 작성한 훌륭한 개헌안이 이미 있기는 하지만, ‘제7공화국 운동’은 결론을 열어둔 채 여러 새로운 요구와 열망,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끌어안아야 한다. 거대한 촛불 항쟁을 통해 시민사회의 가장 활발한 부분들이 오히려 ‘제6공화국’ 질서의 구심력에 빨려들고 만 ‘비극적’ 상황에서 진보적 대중운동의 흐름들을 재건하려면, 이 정도 거대 기획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바라건대, 제21대 국회에 대한 첫 번째 전 당적 대응을 마친 정의당이 냉정한 자기 평가와 함께 위의 전망을 진지하게 검토했으면 한다. 그래서 ‘제7공화국 운동’을 대선을 준비해가는 과정에서 정의당의 핵심 내용이자, 20여 년에 걸친 정치 개혁 노력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 뒤에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을 폐허 위에서 다시 일으키는 첫 번째 계기로 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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